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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주의 시간

가장 가슴 아픈 단어 엄마 본문

부사관/나의 부사관 인생

가장 가슴 아픈 단어 엄마

life is money 2020. 6. 17.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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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블주 입니다.


오늘 이렇게 포스팅을 하다 보니 

엄마가 갑자기 생각이 났습니다.


당시에도 담담하고 지금도 담담하지만 

가슴 한편으로는 조금 씁쓸하기도 한 단어입니다.


저의 어머니는 제가 부사관으로써 2년 차 복무를 하던 때에

장이 안 좋아 져서 서울에 있는 순천향대학병원에

입원을 했었습니다.


( 항암 초기 어머니의 모습, 머리숱도 많다. )


입원하시기 전부터 배변 활동이 조금 어렵고 

시원하게 볼일을 못 본다며 전화가 왔을때마다

저는 별거 아니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바쁘다면서 전화를 먼저 끊었던 적도 있었고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날들이 대부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증상이 완화되지 않아서 밥도 제대로 못드셨을때

큰 병원가서 건강검진이라도 받으라고 

150만원을 손에 쥐어줬었는데


그 말을 한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서 병원으로 응급 후송되었죠.

아버지한테 소식을 듣고 급히 병원으로 청원휴가를 내고

달려갈때까지 저는 큰 걱정 없이 갔었습니다.


청천벽력같은 소리였습니다.

직장암 말기 저의 가족중에 암 환자가 나올 것이라는 생각은

정말 꿈에도 몰랐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걱정할까봐 별거 아니라는 이야기만 해주고 

저를 따로 불러서 해줬던 이야기였습니다.


그 때도 저는 참 모질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와 단 둘이 있을 때 저는 어머니가 직장암 말기라고

그 자리에서 숨김없이 이야기 했었거든요.


저의 생각은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 거 

어차피 항암 치료 받아야 될 거

미리 마음에 준비를 해 두셨으면 하는 바램에

그렇게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살면서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몇 번 보지 못했었는데

제가 말을 꺼내자 마자 닭 똥 같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가족에 대한 원망도 하시고 마치 어린이가 투정을 부리듯이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평생 원하는 물건을 사서 써 본 적도 없던 분이셨고, IMF때 빚을 제때 갚지 못해서 정말 오랜 기간동안 가족들한테 조차 숨기고 채권자들한테 독촉 문자가 왔었다는 것을 저는 정말 오랜 기간이 흘러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첫 월급을 타서 어머니께 구두와 가방을 선물 했었던 적이 있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던 도중에 사용한 흔적이 단 한번도 없었던 제가 선물한 가방과 구두가 그대로 놓여 있었죠. 


가슴이 아팠습니다.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해보지 못한 것들

그 흔한 동창회


아무 것도 해보지 못하고 힘든 항암 치료를 받았습니다.

직장암이라서 먹을 것도 가려서 먹었어야 됬고

고기 종류도 가려서 먹었어야 했죠.


처음 항암 치료를 받았던 1년은 어느 정도 좋은 조짐이 많이 보여서

집에서 병원으로 격 주 단위로 짧게 항암 치료를 받는 것으로 바꼈었는데 다시 재발이 되는 바람에 이번에는 손을 쓸 수가 없어서

장루를 진행하게 되었었죠.


어머니는 약간의 우울증도 오기 시작했었습니다.

장루라는 것이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만

항문을 통해서 생리 현상을 해결하는 것이 아닌

인공적으로 대장을 옆구리로 빼내서 생리 현상을 해결 하게 끔 하는 수술이라 수술 전 정신 치료를 병행해서 받고 

환자의 동의를 얻어야만 진행할 수 있는 수술이었습니다.


암 수술 중 암의 재발 진도가 너무 깊어서 동의 없이

진행이 되었고 결과가 이렇게 진행 되었었죠.


그렇게 다시 1년이 지났을 때 였습니다.

암의 완치 진도는 전혀 좋지 안았습니다.

아버지도 하던 사업을 멈추고 어머니 곁에 있었고 여동생은

당시 대학생이라 학교를 빠질 수 있는 입장도 아니고

저는 직업 군인이라 자주 보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죠.


직장에서 시작 된 암은 골수와 뼈, 피부를 통해서 뇌까지 빠르게 전이가 이루어 졌고, 어머니는 점점 강해지는 항암 치료로 인해 지칠때로

지쳐 계신 상태였습니다.


( 머리숱이 다 빠진 후 부끄럽다면서 더우나 추우나 항상 비니를 쓰고 계셨는데 이 때는 있던 머리도 없어져서 체념한 상태입니다.)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근 3년이라는 시간을 어머니에게 가족들은 투자를 했었지만

결국 들은 말은 준비하는 것이 좋다 라는답변이었습니다.


어머니도 사실을 듣고 체념하는 모습을 많이 보였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런 어머니가 안쓰러워서

살아 있는 시간 동안만이라도 여행을 다니면서

그동안 힘들었던 시간을 잊어 버릴 수 있도록 계획을 짜고 계셨습니다


항암 치료를 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치료가 혹시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바로 피 주사 입니다. 항암 약이 더 이상 효과를 내지 못할 때 이 피주사를 놓는다고 합니다.


장점과 단점이 있는데 정말 나이가 지긋하게 드신 분들은 신체의 세포 성장이 느려서 수명을 어느정도 늘릴 때 이 피주사를 놓는데 저의 어머니는 57세의 나이로 전신에 암세포가 퍼져있는데 보호자의 동의 없이 어머니 본인께서 의사한테 피 주사를 놔달라 하여 주사를 맞았습니다. 


저희 가족은 피 주사를 놓치 않으려고 했었거든요.

신체의 세포 성장이 빠른 사람이 피 주사를 맞으면

암세포의 전이 속도가 더 빨라질 수 있다는 단점 때문이었죠.

어머니도 살고 싶었을 겁니다. 이해합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심정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계획은 그렇게 실행되지 못하고 어머니의 상태는 나빠질때로 나빠진 상태여서

가끔 발작을 일으키고 사경을 헤매는 시간이 더욱 많아졌었습니다.


실감이 안났었습니다.

긴 항암 치료를 하는 그 순간에도 이런 모습을 보였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저는 그런 모습을 보고 정말 시간이 머지 않았다 라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러다 몇 일 만에 깨어나시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쌩쌩한 모습도 보여 줬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큰아버지는 회광반조다 라면서 얼마 남지 않았어라는 말을 하셨죠.


그렇게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한달 뒤 고향 요양원(충남 태안군)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담당 의사가 12시를 넘기지 못할 거라는 말과는 다르게 새벽 4시 04분어머니는 하늘나라로 떠나셨습니다. 하늘에서는 속세의 고통 없이 잘 지내실 거라고 믿습니다.


다시 태어 나신다면 부유하고 걱정 없이 원하는 것을 모두 이뤄내고 하고싶은 것을 모두 할 수 있는 그런 인생을 사실 거라고 믿고요.


항암 치료 도중 그렇게 좋아하셨던 레몬 티를 삼키지도 못하고 입에 머금다 뱉을 때도 혀에 맛이 느껴진다면서 좋아하셨던 어머니.

정말 보고 싶습니다.


돌아가시고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는지 요즘은 엄마가 웃고 있던 모습이 기억이 잘 안납니다.

불효자인 것 같습니다 하핳 



( 어머니가 집-병원을 병행하며 다닐 때 마지막 뒷 모습 )

( 장소 : 충남 태안군 집 앞 바닷가 )


그래도 가끔 직장 동료나 주변 지인들이 어머니와 통화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 한편이 조금 공허하고 쓸쓸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것 또한 저의 군 생활 중 일부였던 에피소드였고

다시 한번 부모님이 살아있으실 동안 최선을 다하는 것이 후회가 남지 않는다는 말을 블로그를 방문하시는 모든 분들께 전하고 싶어서 

포스팅 하게 되었습니다!


모두 하루의 마무리 잘 끝내길 바라겠습니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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